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를로스 클라이버 (문단 편집) === 레퍼토리와 음반 === >Kleiber's discography is small but select. >클라이버의 디스코그래피는 적지만 엄선되었다. >---- >[[https://www.theguardian.com/news/2004/jul/21/guardianobituaries.artsobituaries|더 가디언]] 그의 레퍼토리는 상당히 한정되어 있는 편이다. 유명해지고 나서 레퍼토리가 좁아졌다는 서술이 적혀 있는데, 사실은 오페라를 제외한 관현악에서는 이 서술과 반대에 가깝다. 데뷔 초부터 그의 레퍼토리는 매우 좁았다. 오히려 유명해지고 나서 음반을 취입하려는 DG의 성화 때문에 브람스와 슈베르트까지 레퍼토리가 넓어진 케이스다. 그의 관현악 레퍼토리로는 베토벤 교향곡 4, [[https://youtu.be/PNpyRBVTavQ|5]][* 5번은 용두사미라는 평가가 있다. 뒤로 갈수록 집중력을 잃는다는 혹평이 있는데, 1악장은 리듬감이 죽이기 때문에 1악장만 듣고 치운다는 사람이 제법 많다.][* [[https://youtu.be/q7q2XwJZrFQ|1981년 멕시코실코황]]은 영상의 퀄리티가 매우 떨어지지만 연주는 DG반보다 낫다는 사람들이 많다. 다만 이렇게까지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찾는 것보다는 미하일 길렌과 [[바덴바덴과 프라이부르크 남서독일 방송 교향악단]]의 [[https://youtu.be/cylEl-IuUgE|1997년 실황]]을 찾는 쪽이 낫다. 음질도 좋고 용두사미 느낌도 없다.], 6번, 7번[* [[https://www.youtube.com/watch?v=xuzRkGqJx_U|DG의 녹음]]은 그의 브람스 교향곡 4번과 다른 의미로 호불호가 심하게 갈린다. 일부 클라이버빠들이 DG녹음 탓으로 매도하고 있지만 금관이 많이 약한 탓에 하이브리드 SACD로 발매된 [[https://youtu.be/z3OZLb2xyCU|오르페오의 82년도 실황]]을 많이 찾는다. 클라이버가 빈 필 과 녹음한 모든 DG음반들의 금관들이 약한 편이다. 이후 [[https://youtu.be/O-6uqwANpyw|1986년 바이에른 국립 오케스트라와의 도쿄 실황영상]]에서는 이 문제가 나아졌다.], 브람스 교향곡 2, [[https://youtu.be/wxB5vkZy7nM|4번]][* DG의 80년도 녹음은 DG에 남긴 마지막 녹음인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전에 녹음한 마지막 교향곡 녹음이다. 그래서 그런지 앞의 녹음들에 비하면 완성도가 높은 편이다. 문제점은 브람스의 느낌이 안느껴질 정도로 개성적이라 호불호가 갈린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비교적 이완된 [[https://youtu.be/yZjQLiw8Ceg|96년도 영상물]]을 찾는 애호가들이 많다.], 모차르트 교향곡 33, 36번, 하이든 교향곡 94번, 슈베르트 교향곡 3번, [[https://youtu.be/dB5gEzLqTlg|8번]], 마탄의 사수 서곡 등이 그의 레퍼토리의 대부분이다.[* 이외에도 초창기 하이든 등 지휘한 녹음은 일부 있으나 만년으로 갈수록 베토벤과 모차르트, 브람스의 교향곡만 자주 지휘했다.] 70년대까지 그가 콘서트에서 주로 지휘했던 작품은 베토벤 교향곡 5번, 7번이었고, 나머지 곡들은 70년대 후반에 추가된 것이다. 브람스나 슈베르트 교향곡들은 이전에 그가 콘서트에서 지휘해 본 적이 없었다가 신규 레퍼토리를 녹음하려는 DG 측의 요구와 맞아 떨어지면서 음반 녹음을 통해 처음으로 지휘해 본 경우였다. 80년대 초반 이후에는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더 이상 지휘하지 않았고, 브람스 교향곡 4번, 베토벤 교향곡 4, 7번에 집중되었으며, 여기에 콘서트 시간을 채우기 위해 하이든 94번이나 모차르트 33번, 36번 혹은 슈베르트 3번을 함께 공연하는 경우가 많았다. 칼 뵘 추도 콘서트에서 실황 녹음한 베토벤 교향곡 4번은 이 곡의 명반을 논할 때 항상 거론될 정도로 칭송받고 있다. 슈베르트 교향곡 3, 8번은 당시 DG의 권유로 음반 취입에 들어간 것으로 보이며, 녹음 기간과 겹치는 빈 필 콘서트에서 각각 한 번씩 지휘해 보고는 이후에는 거의 지휘하지 않았다. 8번의 경우 이후 다시 지휘해 본 적이 없고, 3번의 경우 87번에 한 번 더 지휘해긴 했다. 논란 많은 베토벤 교향곡 6번 역시 뮌헨에서 단 한 번 지휘해 보고 이후에 다시 지휘하지 않았다. 커리어 최만년인 1993년에는 신규 레퍼토리인 영웅의 생애를 빈 필과 연주하기도 했다. 클라이버도 전통적인 독일의 오페라 지휘자 코스를 밟아왔다.[* 이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사실이 독일의 지휘자가 양성되는 제도 자체가 콘서트가 아닌 오페라 음악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공부하고 커리어를 시작하는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오페라극장의 견습 및 보조 지휘자부터 시작해 제2카펠마이스터-제1카펠마이스터 식의 수순을 밟기 때문이다. 정명훈을 제외한 그나마 오페라를 좀 다룰줄 아는 국내 지휘자인 최희준, 구자범, 지중배 등도 모두 극장의 카펠마이스터 출신으로, 위의 과정을 거친 지휘자들이다] 실제로 그의 전생애를 걸친 공연에서 오페라 공연 횟수가 교향악 콘서트보다 훨씬 많다. 젊은 시절에는 꽤나 다양한 오페라를 지휘하였고, 60년대만 하더라도 지휘할 수 있는 오페라가 120여개였다라고 본 문서에 적혀 있었는데, 사실은 이와 다르다. 클라이버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규직 지휘자를 맡았던 슈투트가르트 국립 오페라에서 재직했던 7년 동안 클라이버가 지휘했던 작품은 베르디 [[리골레토]], [[라트라비아타]], [[오텔로]], 푸치니 라보엠, [[나비부인]], 비제 [[카르멘]], 베버 [[마탄의 사수]],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슈트라우스 [[장미의 기사]], [[엘렉트라]], 베르크 보체크가 전부였다. 슈투트가르트에 재직했던 7년 동안 클라이버는 이 11 작품만 돌려서 반복 지휘했다. 그는 커리어 초창기에 취리히 등에서 오페레타를 지휘하던 시절을 제외하고 1966년 6월 슈투트가르트 국립 오페라와 정식 계약한 이후 그가 마지막으로 오페라를 지휘한 1994년까지 30년 동안 이 11곡의 오페라에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 [[박쥐]]까지 합한 12곡의 오페라 이외에 다른 작품을 지휘해 본 적이 없다. 슈투트가르트 이전 60년대 초반에는 덜 유명한 작품을 지휘하기도 했지만 역시 레퍼토리의 폭은 넓지는 않았으며, 취리히를 중심으로 동일한 곡을 수십번씩 반복해서 공연하곤 하였다. 그가 120곡을 지휘할 수 있었다는 이전 문서 서술의 근거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참고로 메이저 오페라 작곡가라고 할 수 있는 모차르트, 바그너, 베르디, 푸치니 이 네명의 오페라 작품이 총 72개이며 그마저도 지금 연주를 거의 안하는 오페라를 제외하면 50개정도 된다. 120개의 오페라면 사실상 현행 연주하고 있는 오페라에, 이름 덜 알려진 마이너 작곡가의 듣보잡 작품까지 모두 끌어 모아야 120개가 될까말까 한다. 오페라 레퍼토리 120편이라는 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수치이며, 최근까지 오페라 지휘로 이름을 날렸던 정명훈 조차 단 한번이라도 지휘한 오페라 포함해도 전체 레퍼토리가 총 30여 작품에 불과하다. ] 그의 마지막 녹음인 [[트리스탄과 이졸데]]나 그가 커리어 최후기에 주로 공연했던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 때문에 그가 바그너와 슈트라우스를 아우르는 정통 독일 후기 낭만주의 오페라 대작에 능한 지휘자라는 인식이 있지만 그가 실제로 지휘했던 바그너 작품은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유일했으며, R. 슈트라우스의 경우에도 장미의 기사와 엘렉트라 단 두 곡만 지휘해 봤다. 오히려 오페라 지휘자로서 클라이버의 진정한 주요 레퍼토리는 '''[[베르디]]'''와 [[푸치니]]였다. 위에 언급된 베르디의 라트라비아타, 오텔로, 리골레토와 푸치니 라보엠, 나비부인은 그의 주요 레퍼토리였으며, 슈투트가르트 이후에도 뮌헨 바이에른 국립 가극장이나 밀라노 스칼라좌, 런던 로열 코벤트 가든에서 수도 없이 공연했었다. 또 60년대 초반에는 팔스타프, [[돈 카를로스|돈 카를로]] 등 베르디의 다른 작품들도 자주 공연했다. ---- 클라이버의 정규녹음은 많지 않다. 80년대초 DG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녹음하다가 분노하여 뛰쳐나온 이후 더이상 스튜디오에서 정규 음반을 녹음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니버설 뮤직에 남겨진 모든 녹음과 영상물을 동원해도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 모든 관현악곡 및 오페라 녹음이 [[디 오리지날]]로 재발매 되기도 하였고 이후 컴플리트 레코딩이라는 이름으로 전집이 재발매되기도 하였다. 본인의 완벽주의 및 한번 비위에 거스르면 평생 척을 지는 성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인 것 같다. 일각에는 클라이버가 좋은 조건에서 녹음하지 못했다는 주장[* 클라이버의 지휘를 신의 기술이라고 칭송한 한 지휘전공자의 주장이다.]을 펼치는 이가 있기도 한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DG는 클라이버에게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좋은 대우와 조건을 제공했다. 레퍼토리 선정에서 클라이버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음반 역사상 자신이 원하는 레퍼토리 위주로 녹음을 할 수 있었던 지휘자는 많지 않다. 예를 들어 샤를르 뒤트와는 베토벤 교향곡을 녹음하고 싶었지만 음반사에서 프랑스 레퍼토리만 녹음하길 원해 결국 프랑스 전문 지휘자로 인식하게 되었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70년대 DG에서 본인이 원하는 레퍼토리를 녹음할 수 있었던 지휘자는 카라얀, 칼 뵘, 번스타인 정도였고, 클라이버와 비슷한 연배인 세이지 오자와의 경우 본인이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지만 DG의 요구로 70년대에 러시아나 프랑스 레퍼토리를 녹음하기도 했다. 클라이버의 전속사였던 DG는 클라이버에게 이례적일 정도로 지원을 해줬는데 교향곡 데뷔 음반을 무려 빈 필과 녹음하게 해줄 정도였다.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DG에서 남긴 마지막으로 남긴 녹음인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경우, 음반사가 이례적으로 오케스트라 리허설로만 열흘을 잡아줄 정도였다. 녹음 세션 이외에 별도 리허설을, 그것도 열흘씩이나 잡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나, 클라이버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당시 동독에 속해 있어 음반 녹음 기회가 많지 않았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를 기용한 덕분에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 클라이버도 레퍼토리와 녹음 기간에서는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요구했지만, 오케스트라, 협연자 선정에서는 음반사가 하자는 대로 따른 부분이 많다. 데뷔 음반을 빈 필에서 녹음한 것도 사실 클라이버의 요구가 아니라 음반사가 과잉 지원해 준 것이었고, 이후에는 바이에른 슈타츠카펠레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등 음반사가 제시한 상대적으로 값싼 오케스트라와의 녹음에도 군말 없이 따른 편이다. 어쨌든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도 좋은 오케스트라였고 사전 리허설 기간도 보장하는 등 여러 지원을 해줬건만 클라이버는 녹음 중에 계속 음반사측의 지원이 미흡하다고 불만을 표출하다가, 마침내 타이틀롤인 테너 르네 콜로[* 르네 콜로는 76년 카라얀과 EMI에서 로엔그린을 녹음할 때도 카라얀과 격렬한 언쟁을 벌여 결국 녹음이 중단된 전례가 있다. 이때 콜로가 카라얀에게 "로엔그린을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전세계에 다섯명이 안되지만, 로엔그린을 지휘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 말고도 1000명(500명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은 된다."라고 한 드립은 유명하다. 중단된 이 녹음은 5년 후인 81년에야 가까스로 재개되어 완성되었다. 당시 로엔그린 녹음이 중단된 바람에 많은 제작비를 투자했던 EMI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카라얀과 EMI가 거리가 멀어지게 된 한 원인이 되었다. 또 이후 EMI가 오페라 녹음에 소극적이게 된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와 싸우고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 잠적해 버리는 바람에 녹음 세션은 영구적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이미 한달이 넘는 녹음 세션을 진행하면서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부었던 DG는 클라이버의 리허설 세션 음원을 짜집기하는 등 갖은 노력 끝에 가까스로 음반을 출시했다.[* 녹음 세션 전에 열흘이나 사전 연습 세션을 할당한 덕분에 가능했다.] 음반이 출반되자 클라이버는 음반사가 자신의 동의 없이 음반을 출반했다면서 깊은 빡침을 표현했고 평생 [[DG]]와 그 이사진을 비난하고 다녔다.[* 클라이버는 이후 DG사를 X같은 회사라고 불렀는데, 슈투트가르트 가극장 스캔들과 더불어 은혜를 원수로 갚은 예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클라이버의 마지막 스튜디오 정규 음반이었다. 물론 80년대 이후로도 음반을 남기긴 했는데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것은 없다. 정식적인 계약으로 만들어진 녹음은 아닌 공연 갔을 때 누가 그걸 몰래 녹음하여 만들어낸 해적음반이 많다. 음질은 어느정도 들어줄 정도로 양호하지만, 정식반의 음질에 턱없는 퀄리티[* 가끔씩은 마이크 주변에 뭐가 부딪혔는지 틱틱거리는 소리도 들린다.]그런 음반들 밖에 없기 때문에 팬들은 그 음반을 해적음반인 것을 알면서도 마구 질렀다고 전해진다. 가장 자신이 있어야하는 몇 곡만 녹음으로 남겼기 때문에 몇 장의 음반만으로 클라이버를 명지휘자로 평가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클라이버의 한계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이다. 이 곡은 클라이버가 거의 지휘하지 않은 곡이지만 그의 사후에 음원이 해적판으로 출시되었다. 안타깝게도 이 음반은 좋은 평을 받지는 못했다. 클라이버도 이 연주회 이후로 더이상 전원을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클라이버는 베토벤 교향곡 중에서 4번, 5번, 7번 세 곡만 녹음하여 모두 찬사를 받고 있지만, 만약 클라이버가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녹음하였다면 평가가 상당히 달라졌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